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2007.11.07 01:01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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텍스트 출처->http://www.hani.co.kr/section-021153000/2007/10/021153000200710250682050.html
“난 피리 부는 사나이가 아니라 목동” 1960년대의 밥 딜런은 저항의 상징 그의 가사들은 시위대의 피켓에 인용되고, 그의 노래는 집회 현장에서 울려 퍼졌다. 그의 음악은 새로운 시대로 가는 송가였다. 하지만… 그 당시 밥 딜런은 그 때문에 상당히 괴로웠다. “내가 한 일이라곤 새로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, 솔직하고 강하게 표현하는 노래를 부른 것뿐이었다. 나는 내가 대변하게 되어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것이 별로 없고 잘 알지도 못했다. 불과 10년 전에 고향을 떠났고 누구에게도 큰 소리로 내 의견을 외친 일이 없었다. 앞날의 내 운명은 삶이 인도하는 대로 가게 되어 있었고, 무슨 문명을 대표하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. 솔직히 이런 상황이었다. 나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보다는 목동에 가까웠다.” - 자서전 <바람만이 아는 대답> 그러나 세상은 그를 목동으로 남겨두지 않았다. 아니, 피리 부는 사나이가 되게끔 강요하고 몰아갔다. 밤마다 집 주변으로 몰려들고, 심지어 집으로침입하는히피들을퇴치하기위해 밥 딜런은 라이플총을 집에 둬야 했다. “시대의 양심으로서의 임무를 회피하지 말라결국 그들이 집 주변을 둘러싸고 횃불 시위를 벌였다. 결국 밥 딜런은 도망치듯이 이사가야 했다. 밥 딜런은 예루살렘으로 건너가 통곡의 벽 앞에서 사진을 찍으며, 자신을 시온주의자로 포장했고, 컨트리 음반을 내며 저항적 포크가수의 이미지에서 탈출하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. 밥 딜런에게 중요한 건, 가족과 음악이었지 시대의 선봉에 서는 게 아니었다. 한편… 서강대에서는 집회가 열릴 때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이 나타나 양희은을 어디엔가 격리시켰다. 학교에서 축제가 열리고, 양희은이 무대에 오르면, 항상 뒤편에서는 그들이 지켜보고 있었다. 학생들 앞에서 <아침이슬>을 못 부르게 하기 위해서였다. 양희은은 학교 무대에서 <아침이슬>을 부르지 않았다. 그러면 학생들은 그 자리에 드러누워 <아침이슬>을 부르라고 요구했다. 양희은은 70년대를 회상할 때마다, 자신이 <아침이슬>을 부른 건 그 노래가 좋아서였지 다른 뜻이 아니었다고 말한다. 그 노래를 만든 김민기도 마찬가지다.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투사가 아닌, 뮤지션이라는 요지의 얘기를 여러 차례 했다. 그들을 그런 위치에 올려놓은 건 대중. 대중이란 언제나 신화를 필요로 하는 법. 신화의 주인공인 영웅을 필요로 한다. 현대 사회에서 신화와 영웅을 만드는 건 매스미디어. 왜 미디어는 이미지를 조작하는가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밥 딜런으로 인해 가장 이득을 본 곳은 어디였을까 그의 집까지 찾아가 횃불 시위를 벌였던 군중들? 그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영웅으로 추대된 밥 딜런? 그렇지 않다. 그의 음반을 찍어 팔았던 레코드사와 사소한 말 한마디를 무슨 경전처럼 취급했던 언론이 이익을 봤다. 그에 비하면 양희은의 음반은 판매금지 조치를 당했으니 이익을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었으려나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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| 2007.12.14 17:25 | PERMALINK | EDIT/DEL | REPLY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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